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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한장

아일랜드 시골로 걸어가는 길 '아일랜드 윅로 웨이'

by 누피짱 2008. 4. 24.


길 위에서 듣는 김광석은 위험하다. 이를테면, 이런 노래. “밤 늦은 여행길에 낯선 길 지나갈 때, 사랑은 떠났지만 추억이 살아올 때, 길가의 안개꽃이 너처럼 미소 지을 때….” 추억이 살아올 때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빠르다. 머리가 지워버린 과거를 내 몸은 기억한다. 겨울 거리에서 내 손을 마주잡던 손가락의 온기를, 봄산 오르던 길에서 머뭇거리며 와 닿던 입술, 그 주름진 굴곡까지도. 짧은 사랑이 지나간 후의 긴 불면의 밤을 그의 노래에 기대어 건너오지 않은 이가 있을까. 어째서 모든 사랑은 첫사랑인 건지, 어째서 사랑의 상처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 건지 묻고 또 물었던 날들. 노래가 살려내는 먼 과거의 기억에 몸이 떨려온다면 아직 청춘인 걸까. 나는 지금 비 내리는 아일랜드에서 그의 노래에 젖고 있다. 바람과 안개, 자욱한 빗줄기 사이로 흩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이 곳만큼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찬 바람 부는 더블린의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김광석과 함께 나를 이 곳으로 불러온 몇 개의 또 다른 이름들을 떠올렸다. 버나드 쇼와 오스카 와일드, 예이츠와 기네스, 아이리쉬 바, IRA,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던 가을밤, 책장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정치와 종교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더블린, 질식할 것처럼 음울하던 그 곳에서 탈출해 “나는 더 이상 내가 신봉하지 않는 것에 봉사하지는 않을 거야. 그것이 나의 가정이건 조국이건 나의 교회건 말이야”라고 선언하기까지, 디덜러스의 삶은 너무 힘겨웠다. 뒤이어 읽은 ‘더블린 사람들’도 읽을수록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이 남루한 인생뿐인 걸까(그 다음 책, 율리시즈는 두께에 질려 찬장 받침대로나 쓰고 있다).

더블린의 첫인상은 조이스의 글만큼이나 어두웠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더블린의 밤은 새벽 3시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평일 새벽, 국도나 지방도로변의 작은 휴게소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영업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폐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 낯선 느낌. 비음 섞인 트로트 가수의 노래 소리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계산대의 아주머니도, 텅 빈 식당도,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모든 것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먼 시간 속으로 물러나 앉은 것만 같은 풍경. 그런 곳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한 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가방을 들고 떠나왔으나 갈 곳을 몰라 서성대는 막막한 눈빛을 한 그녀는 내 모습에 다름아니다.

더블린의 밤거리를 걸으며 김광석의 목소리와 새벽 3시의 휴게소와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는 건 더블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기분 때문이다. 비, 안개, 가을, 밤 이런 것들로 인해 증폭된 우울함이 더블린의 풍경을 그렇게 투사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걸 입증이라도 하듯이 밤거리에는 하늘거리는 원피스 위에 코트를 걸친 볼 붉은 처녀들이 쉽게 눈에 띈다. 거리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사람들 역시 어두운 더블린의 첫인상과는 다르다. 유스호스텔을 찾기 위해 몇 번 길을 물었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길을 알려줬다. 아일랜드는 최근의 경제부흥으로 이제 유럽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가 되어버렸다. 세금 혜택과 상대적 저임금, 영어를 구사하는 교육받은 젊은이들 덕에 수많은 외국 기업들이 아일랜드로 몰려왔다. 정치과 종교라는 이중의 억압에 신음하던 제임스 조이스 시대의 더블린은 사라지고 없다. 소설과 영화가 남긴 이미지에서 벗어나 현실의 아일랜드 속으로 걸어가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첫 인상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만큼이나 우울했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보여행길 윅로 웨이(Wickrow Way·132㎞)는 더블린 남쪽의 말레이 공원(Marley Park)에서 시작된다. 오늘부터 1주일간 내 가이드는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노란 옷을 입은 남자다. 나는 그를 ‘옐로 맨’으로 부르기로 한다. 갈림길마다 서 있는 이 친절한 남자만 따라가면 길의 끝까지 쉽게 갈 수 있다고 하니 믿어보는 수밖에. 옐로 맨은 나무가 우거진 호젓한 흙길을 가리키며 서 있다.

날은 흐리고 안개가 몰려와 길을 지우고 있다. 늙어도 여전히 싱싱한 나무들 사이로 젖은 낙엽이 가득 깔렸다. 숲을 빠져나오니 멀리 더블린 항구가 보이고 황량한 벌판이 펼쳐진다. 어쩌다 한 번씩 몇 마리의 양들과 마주칠 뿐 인적은 없다. 이 길의 장점이자 단점은 132㎞를 걷는 내내 한 번도 마을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거다. 즉 호젓하고 격리된 느낌을 즐길 수 있는 동시에 숙소를 구하기 위해서는 인근 마을로 이동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짧게는 2㎞에서 멀리는 7㎞까지. 오늘은 다섯 시간 30분을 걷고, 2㎞를 더 걸어 숙소를 찾아간다.

다음날에도 날은 흐리고 길 위에 사람은 없다. 강을 오른쪽에 끼고 고사리밭을 통과하는 길. 빽빽한 삼나무숲을 빠져나오니 길이 119m로 아일랜드에서 가장 긴 폭포 파워스코트(Powerscourt)를 만난다. 뒤를 돌아보면 바다가 보이고, 멀리 왼쪽으로는 마을, 오른쪽으로는 황량한 무어랜드다.

주스(Djouce)산에 오르기 위해 길을 튼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정상에 도착하니 갑자기 몰려든 안개가 풍경을 감춰버린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정상에 바람만 요란하다. 여기서부터는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길 위에 깔아놓은 폭 50㎝ 정도의 나무길이 이어진다. 처녀의 젖가슴 같고, 제주의 오름 같고, 조선 막사발 같은 봉우리들이 오른쪽으로 따라온다. 아일랜드의 가을은 유순하다.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캐나다 처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젠틀’하고 ‘마일드’한 가을이다. 식민 통치의 모진 세월을 견뎠던 이들의 순박한 심성을 닮은 걸까. 눈을 현란하게 하는 색의 향연은 없지만 은근하고도 애틋한 얼굴이다.

타이 호수(Lough Tay)의 푸른 물길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니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도보여행가 말론(J B Malone)의 기념비가 서 있다. 바로 이 길을 개척한 사람이다. 1914년 더블린에서 태어난 그는 채 스무살도 되기 전인 1932년부터 더블린 근교의 산과 언덕들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신문의 칼럼과 책을 통해 아일랜드의 숨겨진 도보여행 코스를 안내했던 그는 ‘윅로 웨이’의 코스를 개발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마침내 81년 10월, 윅로 웨이는 공식적 표기가 완료된 아일랜드 최초의 장거리 도보여행길로 선을 보였다. 그는 9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해마다 수천 명의 여행자들이 이 길을 걸으며 그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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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시원하다. 호수의 검푸른 물길 앞으로는 작은 백사장, 뒤로는 부드러운 능선을 가진 산들이 늘어섰다. 8시간을 걷고 난 후 글렌다로(Glendalough) 유스호스텔에 짐을 푼다. 글렌다로는 어여쁜 마을이다. ‘두 호수의 골짜기’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두 개의 호수 발치에 누워 있는 이 곳은 크고 작은 폭포를 품은 숲, 호수를 따라 잘 가꿔진 산책로, 7세기에 건설된 사원 도시(Monastic city)의 유적이 남아있어 수많은 여행자들을 불러모으는 곳이다. 가을빛 완연한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떡갈나무 산책길이 고요하고 아름다워 아침, 저녁으로 거닐었다. 글렌다로의 호수를 지나 산을 넘어 이어지는 포장도로는 영국이 아일랜드 독립 무장게릴라를 진압하기 위해 놓은 군사도로다. 군인들의 막사였던 건물은 캠핑장으로 변해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일요일이고, 길은 고즈넉하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철다리’ 부근에는 밥과 방이 제공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갈 이가 기다릴 터였다. 여전히 날은 흐리고, 갈 길은 멀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오늘로써 나흘째. 후회하고 있다. 노자의 자연설에 넘어간 걸. 원망하고 있다. 소로의 숲으로 가라는 속삭임에 혹한 나를. 어느 스님이 임종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지. 오직 모를 뿐인 줄 알고 가면 그것이 곧 견성이라고. 내가 견성의 경지에 접어든 걸까. 정말 모르겠다. 집 놔두고 왜 이 고생인지. 며칠째 비를 맞거나 잔뜩 흐린 날씨 속에서 혼자 걷다보니 ‘아일랜드 : 기상 악화로 아무 것도 못 봤음. 특기 사항 없음’ 이렇게 일기를 끝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조이스를 20세기의 대문호로 만든 그 ‘의식의 흐름’ 기법. 이런 날씨가 일 년의 대부분인 나라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온갖 상념을 붙잡고 늘어지는 일 외에 달리 할 일이 있을까.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심심한 여행을 하고 있고, 심술까지 난 상태다.

착한 낙관주의자가 되어보기 위해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본다. 왼쪽 발가락 두 개가 시커멓게 멍들고 있지만 아직 빠지진 않았고, 결코 울리지 않아 통신불능지역인지 종종 확인하게 되지만 어쨌든 전화기도 있고, 두 번이나 진흙탕과 똥밭에 미끄러졌지만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넘어질 때 가시에 찔린 손가락이 부어오르고 있지만 최소한 절단 수술 전에는 더블린에 도착하겠지. 도무지 인적이라고는 없는 길을 걷다보니 “돌아가는 길에 공항에서 마주치는 첫 번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선언이라도 하게 될 것 같다. 이 길에서는 사람보다 사슴이 더 자주 보인다. 하루 종일 사람은 딱 두 명 만났는데-그것도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걷는-사슴은 8마리나 마주쳤으니. 마지막 날인 닷새째 되는 날은 31㎞를 걸어야 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길의 대부분이 도로여서-물론 차는 거의 다니지 않는다. 종일 10대나 지나갔을까-지루함이 배가된다. 거기다 두 번이나 옐로 맨을 놓쳐 불안해하며 그를 찾아야 했다. 마침내 옐로 맨이 나타났을 때 끌어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를 둘러싼 일상의 사슬에서 완전히 격리된 고독감을 맛보고 싶은 이들이여, 10월의 아일랜드로 날아오시기를. 아일랜드의 시골길을 걸으며 보낸 1주일, 지독하게 외롭고 고단한 자기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던 디덜러스처럼 나도 어디서나 혼자였다. 마지막 남은 우울의 끝 장면은 말을 잃어가는 아일랜드의 오늘이었다. 동네 할아버지들과 나누던 대화 끝에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공용어는 아일랜드어와 영어지만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쓰기 때문에 점점 아일랜드어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그러고보니 조이스 역시 대학 시절 ‘모국어 회복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 물론 그의 경우는 현실 극복이라는 몸부림으로 조국 아일랜드에 대한 부정의 의미였지만. 아일랜드에서의 마지막 밤, 고유의 언어를 잃어버린 대신 자유와 부를 얻은 사람들 곁에서 기네스라도 한 잔 하며 그들의 모국어에 귀기울이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김남희|도보여행가 www.skywaywalker.net

출처 : [경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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