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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iz전략마케팅

08년 쇼핑몰 마케팅의 핵심 과제는 '차별화'가 아니라 '낯설게 하기'이다.

by 누피짱 2008. 5. 20.

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셨던 분들이라면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일상화된 사물이나 사건들을 낯선 표현을 함으로써 그 사물이 원래 갖고 있는 속성을 새롭게 깨닫게 한다는 문학적 기법이다.

깃발이란 시에서의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든가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같은 표현이 대표적인 '낯설게 하기'의 기법일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우선 시선을 주목 시킨다.


같은 mp3를 팔더라도 '내 주머니 안의 즐거움'을 파는 사람과 '초소형 고성능 mp3'를 파는 사람은 그 수준이 차이가 난다.

'내 주머니 안의 즐거움' 이라는 문장은 시선을 주목 시킨다.

즐거움이 어떻게 주머니 안에 있을까? 이는 수수께끼처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고 답을 보고 싶어하는 적극성을 유도해 낸다.

그러나 '초소형 고성능 mp3'는 아무런 궁금증도 주목성도 갖지 못한다.

마케팅이 문학과 접목 되는 부분은 비단 카피 뿐만이 아니다.

흔하디 흔한 여성의류 쇼핑몰을 마녀의 옷상자나 패션쇼의 무대, 예쁜 드레스룸으로 탈바꿈하여 단지 옷을 진열해 놓은 공간이 아닌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탈바꿈했던 시도들은 모두가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 마녀의 옷상자나 패션쇼의 무대, 예쁜 드레스룸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요는 그곳을 궁금하게 하는가 보고싶게 하는가이다.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황금의 카피를 탄생시킨 디오스 냉장고는 냉장고를 단순한 주방기기가 아니라 여자의 행복을 위한 필수요건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쓸만한 냉장고를 모두 내다 버리고 '여자의 행복'을 카드로 긁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즈음에서 낯설게 하기를 잘 하려면 비유를 써야 하는가 은유를 써야 하는가 상징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뭔 짓을 하더라도 눈에 확 들어오게 당돌한 병치(竝置)를 이루면 된다는 것이다.


냉장고=여자, 냉장고=행복


이런 진부한 병치는 당신의 제품을 삼류상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이런식의 진부한 병치관계는 여성단체의 공격목표가 되기에도 딱 좋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 도대체 그 년이 뭔짓을 했길래? =>디오스를 가질 수 있으니까!!!


이 정도의 당돌함이 있어야 비로소 낯설게 하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요는 바로 가운데 문장인 '도대체 그 년이 뭔짓을 했길래?'가 궁금하게 만드는 명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앞 서 제시했던,


내 주머니 안의 즐거움 => 주머니 속에 대체 뭘 집어 넣었길래? => 존나게 좋은 mp3


의 문장과 같은 원리이다.


당신은 제조업자가 아니라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얼토당토 않은 차별화는 제조업자들에게 맡기고 당신이 할 일은 '낯설게 보이기'이다. 이는 전에 말했던 '공짜선물'과 함께 돈없이 마케팅을 해야하는 불쌍한 당신의 핵심전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 한번 연습해 보자.


만지고 싶은 그 녀의 엉덩이 => 엉덩이에 대체 뭔 짓을 했길래? => 그 녀는 레이세포가 만든 힙스를 입었으니까!

어제와 다른 그 녀의 표정 => 그 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 존나게 좋은 변비약을 먹었거덩.

그 남자가 드디어 똑바로 섰다! => 서? 뭐가 섰는데 응? 응? => 졸라 좋은 수제화를 신었거덩.


해 보면 졸라 잼있는거다. 열심히 해서 새해엔 모두들 돈 졸라 많이 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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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줏어온 문학적인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한 연구자료이다. 이 걸 쓴 사람도 어디서 베꼈는지 출저가 없어 그냥 줏어왔다.


낯설게 하기 혹은 생소화                  

  ……1915년 모스크바 대학의 학생들이 <모스크바 언어학 서클>을 결성하였고 이듬해에는 페크로그라드의 학생들이 <시어연구회>를 결성하여 러시아 형식주의의 출발점이 되어 준다. 이 두 집단의 청년학도들이 지향한 것은 문학연구를 과학적 기반 위에 설정하여 그것을 자신의 방법과 절차를 사용하는 자족적인 학문으로 확립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문학성>의 문제를 그들의 일차적 관심사로 부각시켰다. 즉 일상 언어나 산문적인 언어와 문학 언어를 구별시켜 주는 형식적이고 언어학적인 특징들의 적출이 주요 관심사로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문학의 특수성의 문제는 문학작품의 형식적 특징의 검토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문학작품에 가해지는 역사의 힘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형식주의란 이름은 실상 형식적 특징에 대한 배타적 관심을 비판하는 비판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또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 아니고 또 반영일 수도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미메시스 이론에 도전하려고 하였다. 현실을 반영하기는커녕 현실세계를 새로운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인식을 혼란시키는 경향을 문학작품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널리 알려진 <낯설게 하기>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주의자들은 그리하여 이런 <낯설게 하기> 혹은 생소화(生疎化)의 효과를 생산하는 형식적 장치들을 밝히는 데 지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 러시아 형식주의는 … 러시아 혁명의 청동시대의 매우 활기찬 이론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이론의 핵심적 부분은 오늘날 재평가를 받고 있기조차 하다.

  <낯설게 하기> 혹은 생소화

  지금처럼 소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아이들이 모여서 즐기는 놀이의 하나에 수수께끼 놀음이 있었다. <먼 산 보고 절하는 것은?>의 해답은 디딜방아가 된다. <서 있을 때보다 앉았을 때 더 키가 큰 것은?>의 정답은 개다. 그런가 하면 <앉으면 높아지고 서면 얕아지는 것>은 천정이 된다. <십 리는 가도 오 리는 못 가는 것>처럼 꽤 어려운 수수께끼도 있다. 팔을 굽혀서 손으로 어깨는 닿지만 팔굽 안쪽에 닿지 않는다는 육체적 사실을 가리키는 수수께끼다. 조금만 궁리하면 알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생활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요즘 어린이들에겐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강도  강도 못 건너는 강>처럼 말놀이의 요소가 우세한 것도 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것>처럼 수수께끼 자체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있다.
  농촌 인구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였던 시대에 생활에 밀착해 있던 대표적 수수께끼의 하나는 <푸른 주머니에 은전이 들어 있다가 늙어서는 붉은 주머니에 금전 들은 것>이다.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수께끼의 기본 성격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추는 우리에게 극히 친숙한 것이다. 웬만한 텃밭에서 발견할 수 있고 생남을 나타내는 금줄에도 걸려 있어 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또 <작은 고추가 더 맵다>류의 속담에도 자주 오르내린다. 그런데 이 익숙한 고추가 수수께끼에서는 아주 생소한 것으로 분해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소하게 된 것이 고추의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고추의 식물적 변화가 극적으로 제시되어 고추의 특징적 일면을 돋보여 주고 있다.
  서양 쪽의 고전적인 수수께끼인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유명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 이 수수께끼는 낯선 요소가 없어 보이고 아주 쉬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해답을 찾지 못하여 목숨을 잃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던 예외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생명을 부지하고 영웅으로 추앙받고 마침내는 비극과 파국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변형시켜서 새 수수께끼를 만들어 물어 보면 그 해답이 반드시 쉽게 나오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본래 스핑크스는 네 국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쉽게 대답을 해서 세 국면으로 줄여 버렸다. 생략된 부분이 무엇인가?> 물론 정답은 <밤에는 눕는 것>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사람이란 낯익은 것이 <아침엔 내 발, 점심때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괴물로 생소화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생물학적 변모 국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생물학적 사실이 시사되어 있기도 하다. 인간 본질의 한 국면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들 수수께끼는 모두 비근하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면서 그 특징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쉬클로프스키는 이러한 <낯설게 하기> 혹은 생소화야말로 문학성의 요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본질적으로 언어학을 문학연구에 응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문학은 언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문학의 형식적 요소인 소리, 이미지, 리듬, 구문, 음보(音步), 운, 서술기법과 같은 장치들이 모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탑재자 : 나병철 님은 '의식의 흐름, 알레고리, 몽타주, 제한적 이동' 등을 들고 있습니다. : 소설의 이해. p.448) 문학언어는 <일상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며 문학언어를 다른 담론(談論)형식들과 구별해 주는 것은 그것이 일상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뒤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문학장치들의 압력을 받고 변형된 일상언어는 낯설게 되고 생소화된 언어이다. 일상언어의 규격화된 상투성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현실인식이나 현실지각이 습관화되고 자동화되어 버린다. 생활 속에서 어떤 대상을 지각하거나 인식할 때 그 대상들이 의식에 나타나지 않은 채 마치 어떤 공식을 따른 것처럼 재생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의 예증으로 쉬클로프스키는 톨스토이의 일기를 인용하고 있다.
나는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왔다갔다하다가 소파로 다가갔다. 그런데 소파의 먼지를 털었는지 안 털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러한 동작은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억해 내기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내가 소파의 먼지를 털고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면,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다면, 그것은 행동하지 않은 것과 같은 셈이었다. 만약 의식 있는 어떤 사람이 내 먼지 털기를 지켜보았다면 그것은 기정 사실로 될 터였다. 그러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보았다면, 또 많은 사람들의 복합적인 삶 전부가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면 이러한 삶은 없었던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 문학이나 예술은 습관적인 지각이나 인식이 당연시하고 간과하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사물들을 더욱 인식가능하도록 한다. 또 그 과정에서 언어를 극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우리의 지각이나 반응을 새롭게 갱신시켜 준다. 따라서 문학이나 예술은 우리의 삶의 지각을 회복시켜 주고 우리가 사물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의 목적은 수용되는 대로의 사물의 감각 및 지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예술의 장치나 기술은 대상을 낯설게 하고 형식을 어렵게 하고 지각의 어려움과 지속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지각 과정 그 자체가 예술의 목적이고 또 그것이 될수록 오래 가도록 해야 한다고 쉬클로프스키는 말한다. <낯설게 하기>를 문학성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탁견으로서 우리는 시언어를 그러한 관점에서 접근해 보기로 하자.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닷가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을 <소리없는 아우성>이라고 공감각(共感覺)의 은유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낯설게 하기>의 절묘한 사례가 되어 주고 있다. 직유건 은유건 비유란 것은 이질적인 것의 당돌한 병치(竝置)를 통해서 생소화의 효과를 보여주게 마련이다. <반달 같은 눈썹>이나 <외씨버선>같은 진부한 비유도 하도 많이 써서 규격화 되어 버려 그렇지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지각의 갱신에 기여했을 것이다. <소리없는 아우성>은 다시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되어 낯설게 나타난다. 하도 많이 접해서 이제는 낯익게 되었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생소화의 효과이다. 깃대를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라고 하는 둥 작품 전체가 <낯설게 하기>의 지속적 전개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슬프고 애달픈 마음>의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깃발이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낯설게 하기>의 상승효과인 것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널리 알려진 이 시를 설명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인과관계로부터의 거의 의도적인 탈선이다. 흔히 과학 교사들이 희롱조로 문학의 비과학성을 얘기하면서 이 작품을 예로 들기도 한다. 소쩍새의 울음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 국화꽃이 피는 것이라면 아마도 이 시의 첫절은 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진부한 사실의 묘사로써 일상적인 산문 언어라는 울 안에 갇혀 있고 말 것이다.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인과관계의 뼈대를 벗어난 생소화된 가정이 이 작품을 시로 옮겨 놓고 있다. 국화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은 그리 당돌한 비유는 아니다. 그러나 흔히 서리 속에 피어 절개의 표상처럼 되어 있는 꽃을 세상살이의 신산(辛酸)을 겪은 중년 이후의 여인에 비유하고 있는 것도 조금은 생소화된 것이다. 근대 자연과학의 세계이해가 널리 퍼지기 이전의 서양 중세에서는 자연의 운행을 신이 마련한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침마다 해가 뜨고 알맞게 눈비가 내리는 것이 모두 인간을 위한 신의 배려와 섭리의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밤이 끝나면 어김없이 아침이 되고 볕이 드는 것도 항상적(恒常的)인 기적이었다. 「국화 옆에서」의 세계이해는 근대 자연과학의 교시를 따른 것도 또 서양 중세적인 기적관을 따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소쩍새 울음과 천둥소리와 무서리와 같은 자연 현상이나 자연의 운행이 보이지 않는 연계와 조화 속에 어우러져 있다는 천지지상(天地之常)에 대한 외경과 수용의 소산이다. 따라서 근대 자연과학의 세계 설명이 널리 보급되고 깊이 침투되면 될수록 그 생소화의 효과는 커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시는 과학교사들이 비과학적인 것의 사례로서 희롱조로 거론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매력을 더해갈 지도 모른다. 그러한 뜻에서 모든 시는 그 자체가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사회현상의 생소화

  위에서 시험적으로 분석해 본 <낯설게 하기>의 사례는 그것을 단순한 말초적 기교처럼 보이게 할는지도 모른다. <식민지의 등대처럼/나는 내 어둠을 비친다>는 조병화의 구절이나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 곤충들이 24시간을/자기의 다리처럼 걸어다닌다>는 김수영의 구절은 <낯설게 하기>의 좋은 사례가 되지만 신선한 충격을 순간 속에서 처리해 버리고 만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식민지의 등대>나 <식민지의 곤충들>이 실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낯설게 하기>가 사회현상을 두고 이루어질 때 그것은 충격적인 효과를 빚게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프랑스의 라브뤼에르의 농민 묘사를 예로 들어 사회현상에 대한 생소화 기법의 활용이 역사의식의 대두와 시기를 같이하고 있음을 뜻깊게 상기시켜 준다.

        들녘 여기저기에 사나운 암수 짐승들이 펴져 있음을 본다. 꺼멓고 검푸르고 햇볕에 탄 이들은 땅에 달라붙어 끈질기게 땅을 파고 파뒤집고 한다. 이들은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성싶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일어설 때 보면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들은 사람이다. 이들은 밤이면 제 굴을 찾아들어가고 거기서 검은 빵과 물과 뿌리로 목숨을 부지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씨뿌리고 일하고 거둬들이는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심은 빵에 굶주리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 근대문학에 있어서의 최초의 농민 묘사의 하나라는 위의 대목에서 그때까지 당연지사로 간주되었던 것이 끔찍한 낯설음으로 드러나 있다. 그 낯설음은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비전에 의해서 비로소 간파되고 포착된 것이다. 짐승처럼 처참한 농민의 몰골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것은 결단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의 사회구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평등주의 인간관에 의해 충격 받은 갱신된 지각이 그때껏 예사롭게 받아들여진 것을 용인될 수 없는 낯선 것으로 만들어 놓고 잇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현상의 이상함을 단순한 기법의 차원에서 처리하는 것은 전체의 훼손을 불가피하게 하는 중요한 것의 생략을 수반한다.
  쉬클로프스키는 러시아인답게 톨스토이에서 예를 끌어오고 있다. 대상을 자동화된 지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에 있어 톨스토이는 친숙한 대상의 이름을 대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실천한다. 톨스토이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또 처음 생기는 일인 것처럼 대상을 묘사한다. 어떤 대상을 묘사함에 있어 톨스토이는 대상의 부분들에게 주어진 이름을 피하고 다른 대상의 상응하는 부분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피」라는 작품에서 그는 태형(笞刑)을 이렇게 낯설게 만들고 있다 <법을 어긴 사람들을 벌거벗겨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채찍으로 두들기는 것> 그리고 <맨살 궁둥이를 채찍으로 갈겨대는 것>이라 적어놓고 나서 이렇게 부연하고 있다. <왜 어깨 또는 신체의 다른 부분을 바늘로 찌르거나 집게로 손이나 발을 조이거나 하는 등속의 일 대신에 고통은 주는 이렇듯 미련하고 야만적인 수단을 사용한단 말인가?> 이러한 생소화는 톨스토이가 양심의 가책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한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쉬클로프스키는 지적한다. 태형이라는 익숙한 행위가 그 묘사에 의해서 또 그 성질은 내버려 둔 채 그 형태를 바꾸자는 제의에 의해서 낯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생소화가 사회현상을 놓고 이루어질 때 그것은 통렬한 사회비판이 된다. 사회적 부정의나 부도덕성을 매도하거나 비판할 때 그가 의지하는 것이 생소화의 방법인 것이다. 「콜스토메르」라는 작품에서는 말(馬)이 화자가 되어 말의 관점을 통해서 사유재산제도가 생소화되어 있다.(*탑재자 : 이점에 있어서는 자칫하다가는 수필문학 상상력 논쟁 또는 허구 논쟁으로 비약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태형이나 기독교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이해 못할 것이 있었다. <그 자신의 것> <그의 망아지>란 대관절 무슨 뜻인가? …… 어떤 토지를 자기들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토지를 본 적도 없고 거닐어 본 적도 없다. 그들 사이의 관계라고 해보았자 고작 소위 <주인들>이 자기네 사람들을 학대하는 것이 전부다. 여인들을 자기네 여자라거나 자기네 <아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여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삶 속에서의 복리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것이라고 부른 재산을 위해서 애를 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과 우리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우월성이 분명한 딴 것 말고 이 한가지 미덕만 가지고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피조물의 사닥다리에서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서야 한다고 거침없이 주장할 수 있다. 사람들, 적어도 내가 접촉하는 사람들의 활동은 말(언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우리의 활동은 실행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사유재산제도, 특히 구경한 적도 거닐어 본 적도 없는 토지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재지주 제도의 우스꽝스러운 국면이 비판적으로 폭로되어 잇다. 또 외양과 실제 사이의 거리도 생소화되어 있다. 이렇게 낯익고 당연시되는 사항을 어린이나 동물이나 외국인의 관점을 통해서 낯설게 하고 우스꽝스럽게 생소화하는 것은 현실 풍자 문학이나 항의문학이 흔히 활용한 방법이다.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주의에 저항하여 상대성의 감각을 일깨워 준 계몽주의 시대에도 이러한 방법은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본래 인간이 만든 인위의 소산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은폐 작용이며 흔히 말하는 신호라고 할 때, 낯설게 하기는 이러한 신화를 폭로하여 그 사회적 기반을 흔들리게 한다. 주어진 자연처럼 보인 것이 사실상 인위의 소산이며 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은 그대로 신화의 해체를 위한 첫걸음이 되는 셈이다.
  물론 <낯설게 하기>는 톨스토이의 경우처럼 사회비판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비전의 형태를 취하는 수도 있다. 기계적 행동관습을 극복하여 의식적 경험을 회복시킬 때 사람들은 이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현상학에 신선하게 반응할 수 있다. 사물을 새롭게 발견할 때 사람들은 사물에 붙인 이름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것인가를 알게 된다. 로깡땡이 전차 속에서 의자에 관해 생각하는 장면은 그러한 새로운 지각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 <마귀 몰아내기의 짓거리인 양 저것은 의자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그러나 말은 내 입술에 달라붙어 내려가서 사물에 눌러앉기를 거부한다. 사물들은 제 이름으로부터 구출되었다. 사물들은 완강하고 거대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저기 있다. 그것들을 의자라고 부른다든가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전혀 정신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낯설게 하기>는 문학적 사실의 고립과 문학성의 정의를 위한 시도 속에서 형식주의가 정식화(定式化)한 것일 뿐 규격화되고 상투화된 시각과 통념에서 벗어나 벌거숭이 임금을 알아본 어린이의 눈을 지향하는 모든 시인들이 지향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쉬클로프스키가 그것을 정식화하기 이전에 특히 낭만주의 시인들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실천하였다. 연구자  누구나가 지적하듯이 위즈워드는 <이들 사건과 상황에 어떤 상상력의 채찍을 가해서 평범한 보통 사물이 마음속에 생소한 것인 양 떠오르도록 하는 것>이 자기 시의 의도였다고 적어 놓고 있는 것이다. (*탑재자 : 어린이의눈-수필문학의 논쟁 중 '동수필'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생소화의 이모저모

  <낯설게 하기>의 사회비판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일찌감치 연극 시학 속에 적용하고 실천한 것은 브레히트이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흐름의 고전적 영국 시학에 반대하여 서사연극의 이론을 폈다. 그리하여 그가 반대한 것은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완성이었다. 연극 관객은 그들 자신의 세계로부터 예술 세계로 유괴되거나 납치되어서는 안되고 말짱한 정신을 가지고 현실세계로 복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관객이 극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서사연극에 적절한 무대기술이 생소화 또는 소격효과의 채용이다. 그의 소격효과에 대한 정의는 명쾌하다.

      한 사건이나 등장인물을 소격시킨다는 것은 그저 당연시되는 것, 잘 알려지고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을 그저 해당 사건이나 인물로부터 제기함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킴을 뜻한다.

  즉 관객에 대한 최면적 효과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는 말이 된다. 특정 공간의 분위기를 무대 위에 창출하려 해서도 안 되고 관객이 연극 구경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구경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환상의 극장을 버리고 관습의 극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격효과의 연극에서는 암시나 함축이나 모호함이 숭상되지 않는다. 사실이 존중되어야 하며 감정이 넘쳐서도 안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재미있게 가르쳐야 하고 또 가르치면서 재미를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거짓 의식의 신비화를 무너뜨리고 실천에 필요한 의식을 준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은 자기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한 매체가 되며 의식화의 교과과정이 된다. 브레히트의 연극시학이 사람은 배우는 데서 즐거움을 얻게 마련이라는 인간이해에 기초하고 있지만 소격효과의 연구가 지루하고 답답한 교훈극으로 떨어진다는 일부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자들은 브레히트가 이상적 관객으로 설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의 관객은 의식화를 기다리고 있는 배움과 즐거움에 주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명시적인 이념 전파나 메시지 전달을 표방하는 소격효과의 연극시학이 명시적 가르침에 대한 사고주체 쪽의 저항을 어떻게 감당하고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우리는 러시아 형식주의 신분증명서처럼 되어 있는 <낯설게 하기>의 성질을 검토하였다. 그라나 문학성의 요체로서 검출된 <낯설게 하기>의 효과는 다른 부문에서도 발견된다. 모든 학문상의 새로운 개념은 통념의 <낯설게 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자연과학의 큰 발견인 지동설은 그때까지 진리로 통용되었던 토레미 체계의 극단적인 생소화였다. 현세기에 와서 큰 화제의 하나가 되어온 오이디프스 복합심리는 가족이라는 생물학적, 경제적, 교육적 단위의 생소화하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의 성적(性的)인 파악을 통해서 그것은 부모와 아들 사이의 가족관계를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부자간의 삼각관계로 만들어 놓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성 체계의 생소화를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낯설게 하기>가 형이상학적 비전이나 사회비판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지만 수수께끼의 경우에 확인했듯이 놀이나 말놀이로 나타나는 수도 많다. 그리고 문학의 언어는 본시 말놀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놀이는 일과 권태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기 때문에 비록 순간적이라 하더라도 해방적 기능을 수행한다.

    별들은 연기를 뿜고
    달은 폭음을 내며 날아요
    그야 내가 미쳤죠
    아주 우주적인 공포예요

    어둠이 촛불에 몸 씻듯이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으면
    귀 밝아오노니
    지하수 같은 울음소리……
                       - 정현종, 「심야통화·3」

  위에서 볼 수 있는 한밤의 생소화는 평면적인 차원에서도 우리에게 풋풋한 해방감을 준다. 그것은 지속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은혜로운 부분이 짤막한 순간을 포용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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